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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세상 떠난 안점순 할머니에 이어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 별세

【뉴스라이트】  경남 통영에 거주하던 김복득 할머니가 10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1일 오전 4시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건강 악화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향년 101세. 

 

정대협 등에 따르면 1918년에 태어난 김 할머니는 22세 되던 해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고향 통영에서 필리핀 등지로 끌려가 위안부 피해를 겪었다.

이후 통영으로 돌아와 1994년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공식 등록하고 국내·해외 증언집회에 참여하는 등 피해 사실을 알리는 활동에 적극 임해 왔다.

생존 피해자 가운데 두 번째 고령자인 것으로 알려진 김 할머니는 그간 지병 등으로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해 왔다. 

김 할머니의 빈소는 경남도립통영노인전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올해 들어 숨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다섯명째로 김 할머니의 별세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7명으로 줄었다.

 

한편 지난 3월 30일에는 수원에 거주하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용담 안점순 할머니(1928~2018)가 3월 30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암 투병 중이던 안 할머니는 아주대학교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치료를 받다가 병세 악화로 30일 오전 10시 10분경 세상을 떠났다. 

1928년 서울시 마포구에 태어난 안 할머니는 1942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3년여 동안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1942년 어느 날 안 할머니의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여성들에게 모이라고 한 후 트럭에 태웠고, 그렇게 할머니는 끌려갔다. 14살 되던 해였다. 

기차를 타고 평양, 중국 북경·천진을 거쳐 모래만 보이는 곳으로 끌고 갔다.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전쟁터로 이동할 때마다 여성들을 끌고 다녔다.

생전 안 할머니는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지옥 같던 3년을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해방 후 할머니는 집으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아무 데나 쓰러져 잠을 자고, 밥을 얻어먹으며 밤낮으로 걷고 또 걸었다. 긴 시간을 떠돌다가 1946년 고향(복사골)으로 돌아왔다. 마을 어귀에서 어머니와 극적으로 만났다.

집에 돌아와 석 달을 앓았다.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전쟁 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미군 부대에서 빨래 일을 하다가 이후 대구로 가 친구가 하는 식당에서 함께 장사를 했다.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던 할머니는 1990년께 조카(오빠의 아들)와 수원으로 이사 왔다. 1993년 8월 막내 조카딸 신고로 끔찍했던 '위안부'의 기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할머니는 수요집회, 아시아연대회의 등에 참여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며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4년 5월 수원 올림픽공원에 평화비(평화의 소녀상)가 세워진 후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 지원 단체인 ‘수원평화나비’와 함께하며 ‘평화 활동가’로 나섰다.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후에는 '합의 무효'를 외치며 일본 정부의 '위로금' 수령을 거부했다.

지난해 3월 8일에는 독일 레겐스부르크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순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레겐스부르크 소녀상은 유럽에 처음으로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었다. 

지난해 12월 13일에는 수원 웨딩팰리스에서 구순 잔치상을 받았다. 수원평화나비 주최로 열린 이날 잔치에서 할머니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축하객들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다. 

안 할머니와 꾸준히 인연을 이어 온 수원시는 지난 3월 8일 안점순(90) 할머니의 삶을 다룬 헌정 영상 ‘안점순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제작해 공개하기도 했다. 

안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수원시와 인터뷰에서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청춘은 돌아올 수 없다”면서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 곁에 와서 (사과의) 말 한마디라도 하는 게 원칙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이제라도 사죄 한마디 하면 다 끝날 일”이라며 일본 정부의 사과를 거듭 요구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추도사에서 “1942년, 일제 치하 14살 소녀는 ‘마을 여자들은 다 모이라’는 말을 듣고 방앗간 앞으로 나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머나먼 이국땅으로 끌려갔다”며 “그곳에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으셨다”고 말했다. 이어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식모살이, 식당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하셨고, 씻기지 않는 치욕의 상처로 혼인도 못한 채 홀로 살아오셨다”며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이야기했다.

염 시장은 또 “1993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로 등록하고, 수요집회·인권캠프·아시아연대회의 활동 등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셨다”며 “할머니는 우리 근대사의 가장 뼈아픈 부분을 맨몸으로 견디신 희생자였고, 우리에게는 자랑스럽고 소중한 한 사람의 수원시민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안 할머니는 지병으로 몸져누우신 순간까지도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인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 한마디를 듣기 위해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며 “하지만 평생의 소원이었던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는 끝내 받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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